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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기노 하루 X 마에노 아키

망 @zn_k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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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D엔딩 이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나 왔어."

"오, 왔냐? 빨리 왔네. 어서 와, 츠기노."

 

저녁 준비해뒀다고? 뭐, 네가 만든 걸 데웠을 뿐이지만.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풍기는 음식 냄새와 온기, 그리고 인사를 받아주는 선생님의 목소리. 누군가가 집에서 반겨주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츠기노는 간질거리는 기분에 기쁜 듯 미소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비어있던 현관에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앞치마를 앉은 채로 수저를 놓고 있는 마에노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틀 전 문득 선생님에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서, 영 별로라면 벗어도 좋으니 입어 달라고 한 거였는데... 꽤나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제대로 입고 있는 모습에 살짝 웃었다.

 

"손 씻고 와서 고기 조림 좀 퍼줄래? 내가 담으면 조금씩 흘려서 말이지..."

"앗, 응! 빨리 씻고 와서 도울게."

 

마에노의 말에 빠르게 가방을 한쪽에 내려두고 겉옷을 벗은 츠기노가 한걸음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츠기노는 손을 꼼꼼히 씻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비추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만 보던 것이, 자신이 오면 누군가 맞이해주고 함께 저녁을 먹는 일상과 소중한 사람이 저 문 바로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 설레기 그지 없었다. 기분 좋은 마음을 추스리고는 손의 물기를 털어 바깥으로 나섰다. 어느새 덜어야 하는 조림을 제외하고는 전부 식탁 위에 먹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츠기노는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에노는 보곤 움직임을 재촉해 조림이 들어있는 냄비 옆의 그릇에 적당한 양을 덜었다. 그리고는 조림의 국물이 식탁 위에 흐르지 않도록 조심히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직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 조림은 식탁에 오르자마자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마에노가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수저를 집어 들고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츠기노에게 말을 건네었다.

 

"잘 먹을게, 츠기노."

"응, 나도 잘 먹을게. 고마워 선생님."

 

츠기노가 야채 볶음의 연근을 집어 먹었다. 마에노는 조림의 감자를 집어 먹었다. 아침에 외출하기 전 요리를 만든 츠기노도 막 깨어나 한 조각 얻어먹은 마에노도 전부 맛을 보았던 것들이지만, 냉장고에 보관해 차가워진 볶음 요리는 조금 느낌이 달랐고, 츠기노가 저녁에 다시 데울 것을 생각하고 잘 졸였던 조림은 딱 알맞은 간이 되어 있었다. 츠기노는 생각대로의 저녁 식사에 만족하며 마에노를 봤고, 마에노도 퍽 기분 좋은 얼굴로 음식을 씹다가 츠기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오늘은 어땠냐?"

"으음, 오늘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었어. 모르는 걸 배우고, 친구들과 이야기한 정도일까."

 

츠기노가 밥을 한 젓가락 떠 먹었다. 마에노도 밥을 한 젓갈 떠 입에 넣었다. 마에노와 츠기노가 동거를 시작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츠기노는 마에노의 권유에 따라 예비 학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츠기노와 비슷한 나잇대의 학생들이 많았고, 막 법적 성인이 된 아이들은 츠기노에게 결여되어있던 학창 시절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일들을 벌였다. 물론, 츠기노는 마에노가 집에 있었기에 밤 늦게까지 어울리거나 위험한 짓은 일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 저녁을 먹을 때마다 마에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꾸준히 생겼다. 마에노는 츠기노의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에 뿌듯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거 다행이네. 모르는 걸 배워가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친구들은 어떻고? 너라면 잘 사귀었을 것 같지만 말야."

"확실히 잘하기 위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그런지, 더 재밌는 것 같아. 후후,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 하지만 대부분 친절해서, 내가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줬어."

 

츠기노가 국을 한 모금 삼켰다. 마에노는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마에노는 부드럽게 졸여진 고기를 먹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던 탓에, 치안이 좋지 않은 곳과 가까운 곳으로 보내 썩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츠기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나마 쌓여있던 불안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입안에서 씹히는 고기가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마에노가 기분 좋게 고기를 씹고 있으면, 츠기노가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는 고민하는 듯 마에노를 보며 침음했다.

 

"아, 근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잠시 고민하던 츠기노가 조림의 고기 한 점을 집고는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에노도 츠기노의 답을 기다리며 밥을 크게 한 젓갈을 퍼 먹었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한 츠기노의 모습에 마에노는 아무 재촉 없이 기다렸다. 눈까지 꾹 감은 채로 말을 고르던 츠기노가 결국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게 말이지.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 내가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친해지지 못하는 건 상관 없는데, 나와 잘 지내주는 다른 친구들이 힘들어해서 곤란하달지..."

"뭐어? 하아... 그런 녀석, 어딜 가도 한 명 즈음 있지. 어른이나 되어선 유치한 짓을 하곤 말야...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츠기노가 다시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마에노의 질문에 고민하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로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부드럽게 조려져 입안에서 순식간에 녹는 고기에 아쉬움을 느끼며 꿀꺽 삼킨 츠기노가 살짝 미소 지은 채로 마에노를 보며 입을 열었고, 마에노는 츠기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츠기노의 말을 막아섰다.

 

"조림이 조금 짜게 됐나?"

"응? ...어라, 정말이야. 다시 먹어보니 생각보다 짜게 됐네. 간은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사실은 책을 보다가 츠기노 네가 말한 것보다 조금 더 졸여버렸거든. 내 잘못이야, 내 잘못. 그래도 그냥 먹기에 짠 느낌이지, 밥이랑 먹으면 딱 어울려서 괜찮지 않냐?"

 

마에노가 고개를 으쓱이며 물을 뜨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젓가락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살짝 시선을 돌렸다. 츠기노는 조림의 고기를 입에 넣고 있었다. 밥의 양은 조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마에노가 한쪽에 미리 준비해뒀던 컵 두 잔을 챙기며 츠기노에게 질문을 건넸다.

 

"미안, 미안. 말을 끊어버렸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고 싶다고?"

"으음, 그러게... 계속 눈치를 받곤 있지만, 다른 친구들도 같이 화내줘서 딱히 상처는 받지 않았거든. 오히려 이런 일은 처음이라 기뻤다 해야할지... 언젠가 지치겠지 싶어서 넘어가려 했어."

 

츠기노 하루가 고기를 먹었다. 마에노가 식탁에 있지 않음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마에노는 적당한 곳에 컵을 꺼내두고는 냉장고에서 차가 든 물통을 꺼내 들었다. 물통을 든 검지 손가락이 긴장에 굳어 있는 것을 본 마에노가 살짝 숨을 골라내고는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아까와는 분위기 명백하게 달랐지만, 마에노는 최대한 태연한 행동거지를 유지했다. 모르는 체 따위는 아니었다. 츠기노는 머리가 좋았고, 츠기노는 마에노가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마에노는 츠기노의 비위를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츠기노가 아직 이 식사의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았고, 이 식사 자리에서 벗어난 반응을 하여 애매하게 자극을 하면 돌아올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웠으니까. 츠기노는 그를 알고 있는 것인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렇지 않은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근데, 집으로 오는 길에 다시 마주친 거 있지. 게다가 마침 그 시간대라면, 정말 사람 한 명 다니지 않는 길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소란스러워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는데."

 

츠기노 하루가 살점을 입에 넣었다. 마에노가 무엇을 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로 그저 입 안의 것을 기분 좋게 씹고는,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너무 부드러운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마에노는 그런 츠기노는 조금씩 바라보면서 냉장고에 들어있던 물을 컵에 따랐다. 물은 딱 한 컵 분량만 남아 있었고, 마에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혹은 알고 있었다는 듯 신경 쓰지 않고 하나의 컵 만을 챙겼다. 어차피 목적은 츠기노에게 물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고, 이미 같잖은 연기나 연출을 내보일 시점은 지나있었다. 몇 개의 잘 익힌 살점을 삼킨 츠기노가 부드럽게 웃고는 마에노를 향해 미소 지었다.

 

"후후... 그래도, 참았어. 선생님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래, 말대로 잘 했네."

 

츠기노 하루가 살점을 씹었다. 마에노 아키는 아무 말 없이 츠기노의 옆으로 가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츠기노의 왼쪽에 내려뒀다. 자, 마시면서 속이라도 식혀. 뭐어,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말이지. 응. 고마워. 츠기노가 감사 인사를 남기며 비어있던 왼손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마에노의 소매를 꼭 쥔 채로 마에노를 올려다봤다. 식탁 위의 작은 고깃덩이는 더 이상 ■■■ ■■ 에게 만족감을 남길 수 없었다. 

"선생님도 잘 했다고 생각한거지? 칭찬할 만큼... 사랑해줄 만큼?"

 

츠기노 하루가 젓가락을 내려뒀다. 그리고는 비게 된 오른손도 조심스레 뻗어 이내 마에노의 손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틀어 쥐었다. 조심스레 잡자마자 힘을 잔뜩 쥐어 뿌리칠 수도 없게 만든 츠기노는, 의자에서 조심스레 일어나 마에노를 내려다봤다. 마에노는 그 시선 때문인지, 손에서 느껴지는 압력 탓인지 표정을 살짝 구긴 채로 츠기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에노 아키를 향한 채로 고정되어 있는 잔뜩 열기를 품은 시선. 마에노를 주시하는 칠흑 같은 눈에는 생기란 없었다. 

우당탕! 짧은 침묵과 시선 교환 후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마에노가 주춤대며 살짝 발을 옮기자마자, 츠기노가 기다렸다는 듯 마에노를 넘어트렸다. 마에노는 등과 머리에 쏟아지는 충격에 고통스러워할 새도 없이 다음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츠기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있잖아, 선생님? 들어줘. 나... 열심히 참았으니까..."

 

츠기노는 자세를 신경 쓰지 않고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츠기노가 단어 하나 하나를 입으로 뱉을 때 마다 목소리에 담긴 흥분이 짙어져만 갔고, 마에노의 어깨를 누른 손길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츠기노는 칭찬거리를 나열하듯 언제 얼마나 어떤 짓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는 것을 나열하다가, 이내 마에노의 분홍색 눈을 곧게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있는 걸 봤을 때... 이곳에서 없애고, 먹을까 했어. 더 조용히 처리할 수 있고, 그래... 먹고 싶었을지도 몰라."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처음엔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이후에는 황홀한듯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미묘하게 소름이 돋는 목소리에 츠기노의 표정을 바라본 마에노가 표정을 살짝 구겼다. 먹음직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 저것은 마에노를 동등한 사람으로 볼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듯한, 그런... 그리고 츠기노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마에노를 내려보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켜냈다. 

식사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가 맛있었을까, 눈? 뺨도 괜찮고, 팔도 좋았을 것 같아."

 

츠기노는 조곤조곤 속삭이며 마에노의 어깨를 짚었던 손으로 마에노의 눈가를 쓸었다. 삐끗하면 눈을 짓이길 듯한 힘으로 눈꺼풀 위쪽을 천천히 쓸면, 손가락을 따라 피부에 흰 자국이 남았다. 곧이어 붉어질 것이 분명했다. 마에노는 그럼에도 침착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츠기노가 무슨 짓을 할지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침착한 마에노의 표정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린 츠기노가 마에노의 옷을 잡고 끌어내렸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마에노의 상의는 적은 힘으로도 금방 끌어져 내렸고, 그로 인해 옷 아래 가득하던 폭력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드러난 푸르고 붉은 멍들, 이미 전부 나아 흉터가 되어버린 상처들. 상처들은 생긴 지 꽤 되어 보이는 것들 뿐이었다. 츠기노는 나아가는 상처들을 기분 좋게 저번의 즐겁고도 아쉬운 기억을 되새기고는 목덜미의 큰 밴드를 뜯어냈다. 

 

거칠게 뜯겨나간 밴드에 마에노가 작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밴드 아래에는 아직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나을 즈음에 몇 번이나 물려서, 이빨 자국이 몇 개나 패여있는 너덜너덜한 목덜미에 츠기노가 황홀한 듯 미소 지었다. 츠기노는 언제나 이곳을 물었다. 딱히 목덜미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처음 물게 된 곳이 그곳이었고, 물었을 때의 그 느낌과 이빨자국으로 살이 심하게 패인 피부 안쪽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그를 흥분시켰을 뿐이었다. 전까지는 계속 목덜미를 깨무는 것과 동시에 들리는 선생님의 비명 섞인 부름에 정신이 끊겼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이번에야 말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츠기노 하루가 살점을 씹었다. 마에노 아키가, 그의 살점이 츠기노의 입 안에서 뒹굴었다. 입 안이 순식간에 강렬한 쇳비린내로 가득 찼다. 크지 않은 살점인데도, 질기기 짝이 없었다. 츠기노가 바란 것은 이런 것이었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맛이 있는 돼지의 고기 따위가 아니라... 입 안의 ■■■를 씹을 때 마다 입 안이 끈적하고 끔찍한, 동시에 바라지 마지 않던 혈액으로 가득 찼다. 츠기노의 턱을 따라 혈액과 타액이 섞인 무언가가 흘러내렸고, 동시에 위쪽을 바라보고 있던 츠기노가 더 없을 기쁜 표정으로 마에노를 바라봤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꺽꺽대는 소리만을 겨우겨우 흘려대던 마에노는 츠기노가 한껏 음미하고 살점을 삼켜낸 뒤에야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츠기노를 불렀다.

 

"윽, 커흑. 악, 아윽...! 하악, 흐으.... 젠장, 츠기, 노. 정신 차려...!"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이런 거였구나... 그래... 아아, 기뻐. 선생님, 드디어 선생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어..."

 

하지만 선생님도 알고 있었지? 평소처럼 하루라고 간절하게 불러주지 않았으니까... 아니면, 이번엔 완전히 받아줄 생각이었던 거야? 기분 좋은 듯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던 츠기노가 속삭이며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마에노의 목을 어루만졌고, 마에노는 쏟아지는 뜨거운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츠기노는 마에노의 목덜미를 물들인 색과 똑같이 검붉어진 자신의 손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선생님의 피에 물든 기분은 꽤 최고였다.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전등 빛을 쬐이던 츠기노의 시선이 문득 식탁에 꽂혔다. 정확히는, 식탁 위의- 차가운 차가 담긴 투명한 유리잔에. 

 

"...그런데, 선생님. 이게 뭐야?"

츠기노가 팔을 쭉 뻗어 식탁 위의 컵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바로 코 앞까지 컵을 가져와 내용물을 확인했다. 피가 잔뜩 묻긴 했지만, 내용물을 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유리잔 안쪽에는 주황빛의 차가 들어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평범한 보리차일 터였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라면. 츠기노는 내용물을 한참을 바라보다 유리잔을 살짝 흔들었고, 유리잔이 흔들리자 내용물이 찰랑거리는 동시에 보리차의 찌꺼기라기엔 무언가 이상한 하이얀 분비물들이 찻물과 함께 찰랑거리다 다시 내려 앉았다. 이게뭐지? 약? 츠기노의 머릿속이 빙빙 돌아갔다. 내가 본 적 없는 약에, 이 상황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먹이려고 드는 약이라고는... ZENO 환자에게 쓰는 진정제 말고는 없었다. 생각을 끝낸 츠기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한테, 진정제를 먹이려 한거야? 난 선생님을 믿었는데..."

"젠장, 츠기노. 잠시만..."

"듣기 싫어."

 

무어라 말하려는 마에노의 말을 낮은 목소리를 자른 츠기노가 손에 들려있던 유리컵의 내용물을 바닥으로 쏟았다. 바닥에 쏟아저 퍼져나가는 물이 피에 섞이고, 검붉은 피에 엉겨 붙어있던 마에노의 붉은 머리카락을 적셨다. 오늘이야 말로 선생님이 나를 받아준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 말로 준비가 다 됐다고 여겼는데... 어째서? 멍하니 마에노의 피와 차가 섞여나가던 것을 바라보던 츠기노의 빈 손에 차가운 쇠젓가락이 닿았다. 아까 마에노를 넘어트릴 때 같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츠기노의 시선이 마에노의 손으로 옮겨졌다. 성치 않았다면, 약을 탈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몰라... 마에노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린 츠기노가, 젓가락을 손에 꾹 쥐고는 그대로 마에노의 손에 박아 넣었다. 

 

"끄아아악!!! 헉, 흐윽, 아윽. 잠, 잠깐.... 욱... 하루..."

"왜 그랬어? 뭐든지 받아준다고 했잖아. 역시 이번엔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 있던 거지? 그래서 준비한거야... 대답해봐, 선생님. 그러면 받아준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던 거였어? 나는 선생님과 내 일상을 위해 이런 것도 선물했는데...."

지금까진 내가 선생님의 부름에 돌아온 거니까. 다음엔 선생님이 꼭 모든 걸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믿었는데, 믿었는데... 그 사람은 음식에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 푹, 소리와 함께 젓가락이 박힌 부분에서 피가 꾸물꾸물 비어져 나왔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박힌 젓가락은, 사람의 손에 찔러 넣기엔 뭉뚝하고 미끄러웠던 탓에 츠기노의 생각보다 얕게 파여 들어갔다. 츠기노는 다시 꽂아 넣을 생각을 하려다 젓가락을 집어 던지고는, 마에노의 앞치마를 틀어 쥐었다. 하얀색 앞치마에 샛붉은 피가 묻어 났다. 

 

"나는 선생님이 이런 짓을 하라고 이걸 준 게 아니었어! 달라, 다르다고!! 왜 날 안 받아준거야? 대체 왜!"

"커흑... 컥, 츠, 끄윽..."

 

서럽다는 듯 마에노에게 울분을 토해내곤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질문을 토해내듯 외친 츠기노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순식간에 넘실대던 분노를 잠재운 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에노의 목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제는 됐어. 선생님도 역시 나를 포기하고 싶었던 거지? 참으면 무엇이든 받아들여 준다고 했으면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점점 바닥에 눌러 붙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마에노의 목 위에 올려둔 손이 점점 마에노의 목을 옥죄어 갔다. 마에노가 서서히 막히는 숨에 꺽꺽대는 소리를 내며 목을 조르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 끌어내리려 했지만, 발병한 제노 환자의 힘을 평범한 사람의 손으로, 그것도 부상을 입어 하염없이 피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는 끌어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이젠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그래, 내가 선생님을 사랑해줄 테니까!!!"

 

괜찮아, 선생님... 두려워 하지 않아도 돼. 최대한 상냥하게 해줄 테니까. 더 이상 버려질까 불안할 일도, 지키려 했던 게 무너질 일도 없는 거야. 실낱 같은 숨구멍마저 막힌 것을 느낀 마에노가 다리로 마구 츠기노의 몸을 쳤지만 끄떡없었다. 츠기노는 발길질조차도 무시하며 숨이 막히는 탓에 점점 수축되어가 동공을,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마에노의 얼굴을 눈에서 떼지 않았다. 죽어가는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내 다리를 움직이기를 포기한 마에노가 덜덜 떨리는 팔을 꾸역꾸역 들어 올렸다. 아직 채 멎지 않은 피가 팔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도,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마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 성치 않은 팔을 들어 올려서는, 츠기노의 눈가를 닦아냈다. 마에노가 죽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던 츠기노의 시야에, 마에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들어왔다.

 

울지 마.

 

울지 말라고? 머리를 맞은 듯 멍해진 츠기노가 마에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을 떼어내어 자신의 눈가를 더듬거렸다. 뺨과 눈가에 잔뜩 피를 묻히며 더듬거리면, 별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한 가득 피가 묻혀있었다 하더라도, 앞치마에 거의 닦인 탓에 눈물 정도는 느낄 수 있을 텐데... 진득하고 점성이 가득한 액체를 제하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마에노 아키는 이런 상황에 쓸 데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츠기노가 급하게 시선을 내려 마에노를 바라봤고, 그와 동시에 목 뒤쪽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표정을 잔뜩 구긴 채로 목을 짚은 츠기노의 시선에는 당장이라도 감길 듯 흐린 눈에, 창백한 안색으로도 씩 웃고 있는 마에노가 담겨 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익숙하고도 이질적인 기분을 느낀 츠기노가 목에서 손을 떼내었고, 갑작스레 폐에 공기가 들어찬 마에노가 마구 기침을 토해냈다. 덜그럭, 하고 자동 주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옷의 주머니는 마에노의 위에 올라탔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 했었다. 어디서 가져올 시간도 없었다. 준비를 할 시간 따윈 주지 않았는데. 점점 흐려지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곱게 잘린 바닥의 판자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고, 바닥에는 자동 주사기가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이 얼기설기 파여 있었다. 파낸 것 같기도, 무언가로 녹인 것 같기도 한 흔적은 다급한 느낌이 가득했다.

 

"켁, 콜록! 헉, 하아... 이번에는 정말 아슬아슬 했네... 하아, 윽. 아파..."

"언제부터? 왜?"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가 마에노에게 닿았다. 이번에야 말로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츠기노가 다시 한 번 마에노의 목 위에 손을 올리기 위해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을 떼어냈고, 하나의 팔로는 더 이상 상체를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진 몸은 그대로 마에노의 위로 엎어졌다. 마에노는 갑자기 제 몸 위로 쓰러지는 몸뚱아리에 작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가, 목에 닿지 못해 자신의 옷자락을 뜯어낼 듯 부여잡고 있는 츠기노의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 후에야 숨을 골라냈다.

 

"하아.., 이틀 전에 앞치마를 준 순간부터 슬슬이겠구나 했지... 진짜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한 숨 자고 정신 차려, 츠기노. 마에노는 의식이 남아있을지 모를 츠기노에게 속삭이고는 시선을 내려 츠기노가 준 자신의 앞치마를 바라봤다. 흰색 앞치마. 물론 앞치마를 주는 것은 의심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에노는 츠기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을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 속에서 보았던 앞치마와 거의 비슷한 것을 요리도 하지 않는 자신에게 입으라 요구하는 것은 충분히 의심할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일상이었고, 이것은 츠기노의 안에서 트라우마로 남은 일상의 흔적이었으니까. 정신이 아득했다. 피를 꽤 흘리긴 했지만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고, 츠기노를 옮길 체력 따윈 없으니까... 잠시 눈 좀 붙일까. 마에노는 멀어지는 의식을 구태여 붙잡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츠기노 녀석, 아마 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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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노가 눈을 뜨며 의식을 되찾았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 바닥이 아닌 푹신한 매트리스와 시트의 촉감이었다. 의식이 되찾기가 무섭게 두통이 찾아왔고, 고통에 살짝 움츠린 몸 여기저기가 욱씬거렸다. 이번에 새로 생긴 상처에,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멍과 상처들도 같이 난동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한숨 더 잘까... 마에노는 온 몸에서 느껴지는 근육통과 욱씬거림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마에노가 정신을 차렸는데도 입을 꾹 닫고 눈물만을 뚝뚝 떨구고 있는 츠기노가 눈에 들어왔다. 한 두 번도 아닌데, 익숙해지는 낌새 없이 여전히 서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남을 해친 결과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게 아니긴 하지. 그럼에도 전까진 손이라도 잡은 채로 기다렸지만, 이번엔 손을 다치게 한 탓에 그마저도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에노가 결국 츠기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욱씬거리는 몸을 꾸역꾸역 일으켰다.

 

"서, 선생님 그냥 누워 있어도..."

"무슨 대수로운 상처라고. 괜찮아, 괜찮아."

 

마에노가 몸을 일으키자 츠기노가 만류하려 들었지만, 마에노의 괜찮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선생님이 잠들어 있는 동안 새로 생긴 상처를 처치한 것은 자신이고,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쌓인 상처들로 엉망이 된 몸을 본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전부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츠기노가, 꾸역꾸역 목소리를 냈다. 

 

"...선생님. 역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난... 무서워. 이러다 내가 제정신일 때도 선생님에게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서... 역시 내가 시설로 가는 게..."

"츠기노."

단호한 부름이 츠기노의 말허리를 끊었다. 츠기노는 몇 번이고 들었던 단호한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런 목소리를 낼 때면 마에노는 절대 넘어가 주거나 합의를 봐주지 않았다. 사실 이럴 때면, 이라기엔 마에노가 단호하게 굴 때는 언제나 지금과 같이 마에노의 안전을 위해 츠기노가 제대로 된 시설로 가겠다고 말할 때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츠기노도 바로 꼬리를 말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의 손으로 마에노를 죽일 뻔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 없는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뺨에서 약간은 서늘한 감촉과 함께 부드럽게 다듬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츠기노, 여기 봐봐."

"..."

"갸하하! 또 눈이 엄청 부었잖냐. ZENO가 발병한 상태의 너는 날 이렇게 만들면서까지 눈물 한 방울도 맺히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러니 그런 걱정은 접어둬. 너와 ZENO는 제대로 구분되어 있어. 계속 주의한다면, 괜찮을거야."

 

네 일상은,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을 거야.

 

ZENO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 건, 조금 덜 미안해 해도 괜찮지만 말이지... 애초에 바란 건 나니까. 너는 제대로 따라주고 있어. 네 그 감정이 나를 향해서만 쏟아지도록 말이지. 아직 다소 무거운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려 츠기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것은 내 책임이니까. 

 

기억 제거 장치로 분명 크게 완화되거나, 치료가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츠기노의 ZENO는 다시 증세가 깊어지기 시작했고, stage 2를 넘어 3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치료에 관련된 자료들은 시설과 함께 전부 사라졌고, 그나마 함께 하면 가능성이 보일지도 모르거나... 기억 제어 장치를 다시 만들 수 있는 후유 또한 ZENO 환자로써 시설과 함께 묻혔다. 츠기노에게 남은 것은 기적을 기다리거나, 시설로 가 훗날의 ZENO환자를 위한 실험체가 되는 것 뿐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마에노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츠기노 하루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에노는, 기적이나 모르는 이의 미래보다는 츠기노 하루가 누리지 못했던 일상을 억지로라도 부여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니까, 너는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해."

 

제한된 공간, 제한된 시간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적었지만... 역시 아예 없지는 않았다. 매일 함께 먹는 저녁 메뉴가, 그가 학원에서 경험하고 대화하는 것들이 그에게 있어 제일 원하던 경험일테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츠기노가 가장 바랬던 것일 테니... 그럼에도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츠기노의 모습에 마에노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일상을 지켜나가, 츠기노. ...예를 들어, 내일 저녁에 카레를 해준다거나 해서 말이지."

 

마에노의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가 맥이 빠졌는지 샛붉게 부은 눈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은 츠기노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꾸역꾸역 답을 건네었다.

 

"선생님도 정말... 하아... 그렇게 할게. 고기, 많이 넣어줘야겠네."

"그래, 나는 이제 네 카레가 아니면 안 되게 됐다고? 그러니 잔뜩 만들어줘."

 

마에노는 장을 봐야겠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는 츠기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stage 4에 도달할 때가 이 불안정한 일상의 마지막이었고, 마에노는 그 날이 머지 않았음을 오늘로 확인했다. 그 때가 오면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만 했다.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가는 시기. 그 때가 츠기노를 제 손으로 보내줄 마지막 기회겠지만... 여차하면 반항도 못하고 바로 죽을 수 있을 시기이기도 했다. 차라리 지금 멀쩡할 때에 보내주는 것이 좋은 선택인가? 츠기노는 아마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 괴로워하지 않겠지. 온갖 생각을 떠올리던 마에노가 결국 생각을 접고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역시 아니야. 

츠기노 하루의 일상은 하루라도 더 이어져야 하니까.

​음원은 필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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